優秀學術賞(제10호)
수 상 자: 韓相權(덕성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수상논문: 17세기 중엽 해남 윤씨가의 노비소송 (고문서연구 제39호[2011. 8])
선정이유
위 논문은 해남윤씨가에 소장된 고문서를 중심으로 無子女亡妻 재산의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해남윤씨가와 장흥고씨가 사이에 1640년∼1648년까지 8년여에 걸쳐 진행된 소송의 성격과 특징을 검토한 연구이다.
조선시대에는 원칙상 소송을 문서를 작성해서 제출해야만 비로소 소송이 성립하는 문서주의였기 때문에 문자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혼자서 소송을 제기할 수 없었다. 또 소송절차가 복잡하고 법리 또한 매우 난해했기 때문에 소송에 관한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소송을 하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번잡한 소송을 방지하기 위해 타인이 소송에 간여하는 행위는 법으로 금했지만, 외지부 등이 존재하여 백성의 권익을 옹호하였다. 특히 소송 진행과정에서 訟官의 釋明權 행사와 外知部의 존재에 대하여 주목한 것은 해당분야의 향후 연구에 시사하는 점이 크다.
위 논문은 역사학계에서 성숙된 법제사 연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학문의 분화를 극복하고 학제적・통섭적 연구를 지향하는 현재의 경향에 귀감이 될 것이라고 판단되어 수상논문으로 선정하였다.
2012년 12월 14일
韓國法史學會 제5회 瀛山 法史學 學術賞
심사위원회 위원장 서민
수상소감
조선시대에도 사적소유권이 침탈당하였을 경우 소송과 재판을 통해 권리관계를 회복하려는 권리의식이 존재하였음을 밝히는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1960년대부터였다. 박병호 교수는 조선시대의 부동산, 토지, 가옥의 매매 및 담보법에 관한 연구에서 소유권의 인정을 기초로 하여 하여 요청되는 공증제도, 입안제도 등을 고찰하였는데 이는 소송법 연구의 기초가 되는 것이었다. 박 교수는 조선시대 법제도 운영의 자의성, 법의 억압‧수탈기능, 공증제도‧문기제도의 비실효성 등을 주장하는 일본학자들의 주장에 맞서, 실질적인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하여 조선시대 토지제도, 소유권제도의 실상을 검증하고 이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을 내렸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조선시대에도 일반민들 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기준 마련이나 경제적인 이권을 보호할 수 있는 각종 민사 관련 법률들이 제정되는 등 민사법도 형사법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면서 발전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일반민의 소유권 의식의 면모와 토지소유권의 확보를 위한 노력 등을 밝혀낸 박병호 교수의 업적은 이후 조선시대 법사 연구의 초석이 되었다.
2012년 12월 한국법사학회로부터 제5회 瀛山 法史學 學術賞 우수상으로 선정된 졸고 <17세기 중엽 해남윤씨가의 노비 소송>도 박병호 교수의 선구적인 연구 성과를 고문서자료를 통해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이 연구는 사대부들이 율학과 소송을 기피하는 조선시대 사회분위기 하에서,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문기에 의거하여 재판을 하려는 엄격한 증거재판주의 입장을 견지한 강진현감의 역할에 주목하였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목민관들은 율학과 율문을 경시하였고 실무에 서툴렀다. 사대부들이 詩書를 말하기 좋아하고 율령을 읽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회풍조 때문이었다. 목민관들의 刑書 法文의 지식은 거의 文具에 그칠 뿐이기 때문에, 소송에 당하여 책임만 모면하려 하거나 자의적으로 擅斷하기 일쑤였다. 반면 강진현감의 재판이 올바르고 과오가 없었으며, 중립적 지위에서 서서 어느 한쪽 당사자에게 치우침이 없이 불편부당할 수 있었던 까닭은 소송의 진행을 당사자에게만 맡기지 않고, 소송관계를 명료하게 하기 위해 釋明權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석명권 행사는 당사자주의로 진행되는 소송의 형식적 평등의 결함을 補正하여 실질적 평등이 관철될 수 있도록 만드는 효력이 있었다. 강진현감의 석명권 행사는 조선사회가 높은 수준의 법률문화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조선사회에서 일반민의 권리의식의 성장과정을 실증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좀 더 체계적으로 구명할 계획이다. 부족한 논문을 우수 학술상으로 선정해주신 한국법사학회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