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호 신진학술상: 李正善(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강사)

新進學術賞(제11호)
수 상 자: 李正善(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강사)
수상논문: 1910~23년 內鮮結婚 법제의 성립 과정과 그 의미 (法史學硏究 제44호[2011. 10])

선정이유

위 논문은 1910~1923년 內鮮結婚이 공인되기까지의 과정을 조선 내부의 사정,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의 정책 그리고 같은 식민지인 대만과의 사정을 비교하여 그 의미를 규명하였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병합한 후 법적으로는 통합을 하지 않아 식민지 조선에서는 민적법, 일본에서는 호적법으로 분리하였다. 그러나 내선결혼은 양측의 同化를 상징하는 것으로 선전하였지만, 실제로는 그러하지 않았고 특히 내지인 처는 조선인과 결혼하여도 법의 미정비로 入籍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신분관계의 미정리 때문에 중혼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18년 일본은 共通法을 제정하였지만, 여전히 제한적 요소를 두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민족융화의 방안으로 법령을 정비하였다. 1923년 조선호적령이 시행되어 외견상 양측을 통합하는 모양새는 취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구별하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음을 논증하였다.

연구자는 역사학전공자로, 법적 논변을 잘 정리하고 있으며, 또한 풍부하고 세밀한 자료로 논지를 적절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법제사는 법학이면서 동시에 역사학이라는 점과 또 다방면에서 여러 시각에서 역사적 현상을 분석하여 실체에 접근해야 하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신진상 후보로 선정하였다

2012년 12월 14일

韓國法史學會 제5회 瀛山 法史學 學術賞

심사위원회 위원장 서민.

수상소감

먼저 보잘 것 없는 제 논문에 이와 같이 큰 상을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 논문은 1910~23년 간 內鮮結婚, 즉 식민지 조선인과 일본 내지인의 혼인이 당시의 호적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와 그에 관한 법령들이 정비되는 과정을 다룬 것이었는데요. 특히 논문 작성 과정에서 호적제도 및 가족법에 대해 글로나마 많은 가르침을 얻은 박병호 선생님의 호를 딴 상을 수상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이 논문은 2008년 서울대 국사학과에 제출한 석사학위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이기도 한데요. 심사위원으로서 지도와 편달을 아끼지 않으셨던 정긍식 선생님께도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논문을 준비할 당시, 처음부터 법제사를 의도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내선결혼 관련 법령이 정비되는 과정에 대한 선행연구도 있었고요. 하지만 선행연구들을 검토하던 중, 법령의 정비 과정을 법의 내적 논리와는 무관하게 일제의 통치정책 변화에 따라 설명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여, 스스로 잘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즉, 1910년대에는 내선결혼이 호적에 기재되거나 법적으로 성립하는 데 일부 장애가 있다가 1920년대 초 관련 법령의 제정‧정비와 함께 문제가 해소되기에 이르는데요. 이에 대해 일제가 1910년대에는 혼인을 통해 조선인을 同化시키는 데 소극적이었지만, 1920년대에는 적극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식입니다. 이러한 설명에 수긍할 수 없었던 저는 그때부터 조선과 일본 두 지역의 내선결혼 호적 취급 실례를 수집하고, 양측의 가족법과 호적제도에 관한 당대의 법률서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내선결혼의 호적 취급 방식은 조선인 동화에 대한 정책적 의지와는 관계가 없고,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합’하되 이법지역으로 삼았기 때문에 양측의 제도가 충돌한 것과 관련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제는 내선결혼에 정책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당사자의 의사에 따른 혼인은 공인할 생각이었지만 ‘병합’ 초기인 1910년대에는 제도의 차이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고, 1920년대에는 내선결혼 관련 법령을 정비하면서 동시에 1人 1籍 원칙을 관철시켜 조선인과 일본 내지인을 법적으로 구별하는 식민통치제도를 구축했다는 것이 논문의 결론이었는데요. 이는 제도적 측면에서 보자면, 1920년대에 오히려 조선인 동화의 여지가 차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법제도의 내적 논리를 이해하려 노력한 덕분에, 선행연구와는 다른 1910~20년대 역사상을 그리게 된 것입니다. 이는 역사학 전공자인 저에게는 학제간 연구의 필요를 깨닫고, 특히 법제사 연구의 중요성과 매력을 십분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체계적으로 법학을 공부한 적이 없는 사람이기에 법제사를 시도하면서 걱정도 많았는데요. 오늘 이렇게 ‘신진’ 학술상을 수여해주신 것은 말 그대로 아직 부족하지만 신진 연구자로서 앞으로 더욱 열심히 정진하라는 이해와 격려의 말씀을 건네주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영산 학술상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연구자가 되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