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호 우수학술상: 李勛相(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優秀學術賞(제21호)
수 상 자: 李勛相(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수상논문: 「조선후기 충청도의 營吏와 鄕吏, 그리고 이들의 기록물-충청도 감영의 營房과 향리 사회의 연망에 대한 기초연구-」(고문서연구 제50권[2017. 2])
제11회 영산 법사학 학술상 시상식
정종휴 심사위원장, 이상훈, 이훈상, 김창록 한국법사학회 회장

선정이유

이 논문의 저자는 평생을 향리 연구에 힘써온 학자이다. 이 논문 역시 그러한 일련의 연구와 맥을 함께 할 뿐 아니라 일관된 연구의 성과물이며 발전 단계를 보여주는 성과 중 하나이다.

이 연구는 기존의 향리 연구가 경상도·전라도에 집중되어 온 지역적 한계를 지적하면서 충청도의 향리 지도의 완성을 목표로 기획되었다. 특히 전국의 도서관이나 연구소 등의 향리 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일부 개인 소장 자료를 직접 발굴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감영의 營吏案 등을 중심으로, 수록 인물과 성씨, 출신 지역 등 제반 사항을 분석하여 이들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파악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이를 통해 향리 사회의 권력 지형과 지역사 전반에서의 향리의 위상, 지배신분과의 관계 등을 밝히고 신분제 사회에서의 인간군상들의 삶의 양상을 드러내 보였다.

양반 신분 위주의 고문서 연구가 주류인 분위기 속에서 향리 자료를 발굴하고 신분사·사회사·지역사 연구의 지평을 여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논문으로 판단되어 이 논문을 우수상으로 선정하였다.

2018년 12월 14일

韓國法史學會 제11회 瀛山 法史學 學術賞

심사위원회 위원장 정종휴

수상소감

먼저 이 귀한 학술상을 제게 주시기로 결정한 심사위원 여러 분들 그리고 이렇게 영광스런 자리를 마련하여 준 김창록 회장님 등 학회 임원 여러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더불어 후학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학술상을 마련하여 주신 영산 박병호 선생님에게도 무어라 감사 말씀을 드려야 할런지요.

사실 제가 연구 생활을 한 것은 오래 전의 일이고 그 동안 고문서 등의 중요성을 깨닫고 여기에 대한 연구도 집중하여 왔습니다. 따라서 응당 박병호 선생님도 자주 뵈었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지역적으로도 거리가 있는 등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이러한 사실이 말해주듯 결과적으로 외롭게 연구 생활을 한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어제 심포지엄을 열었는데 이것은 주로 경남 일원, 특히 낙동강과 경남 연안 지역을 다니면서 조사하고 수합한 고문서 등과 구술 채록에 기초한 것입니다. 10여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작업인데, 첫 조사를 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25년 전의 일입니다. 수상 소식을 전해왔을 때 고마움과 더불어 가족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사와 연구로 집을 많이 비웠습니다. 종종 아내는 묻습니다. 다른 연구자들과 같이 연구실에서만 할 수 없느냐고. 아내 유제분과 두 아들 이서영과 이찬영에게 진심으로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합니다. 아내는 오늘도 이 자리를 함께 못할 정도로 늘 일이 있었지만, 언제나 저의 조사와 연구가 우선이었습니다. 함께 학문을 했고 덕분에 저의 영감의 원천 중 많은 것이 아내의 각고면려로 얻어진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힙니다.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기도 합니다.

어제 심포지엄의 의제는 기록문화유산과 무형문화유산의 만남입니다. 통영 거제 일원의 많은 마을에서 1850년 전후부터 기록문화전통이 만들어졌고 이 사실을 반영하듯 많은 문서 등이 전승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새로운 문화적 혁신이 세습 무가들이 주도하는 별신굿, 곧 마을 축제와 연동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기록문화권을 찾아낸 것이고 그 역사적 사회적 가치에 초점을 모아 그 동안의 조사 연구를 보고했습니다.

통영과 거제 일원의 어촌 등을 체류하면서 문서와 무형 문화유산을 조사하는 여정이 그 동안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의 제자들의 각별한 노고는 차마 말도 못합니다. 겨울 철 통영 앞바다 죽도에서 목을 파고드는 찬바람은 유독 힘들었습니다. 언제 마무리할지 모르는 작업의 성격상 지원받는 것을 마다했습니다. 덕분에 부산경남고문서총서 21책을 비롯하여 역사 민족지 등 8책을 포함한 29책을 9년 사이에 함께 출간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몇 편의 논문 이상의 공력이 들어간 것들입니다.

편하지 않은 길을 오로지 열정으로 함께 마음을 모은 모두에게 고맙습니다. 공교롭게 그 중 다수가 바로 오늘 부산경남사학회에서 발표하므로 모두가 지금 이 시간에 학회 발표장을 지키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가 받은 이 소중한 학술상이 이들에게 수여되었더라면 아마도 제가 조금 더 마음이 편하고 기뻤을 것입니다. 어려운 대학 현실, 그것도 지방대학의 연구 환경 속에서 어려운 작업을 마다하지 않은 이들이 정말로 격려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저의 지적 여정에서 뒤늦게 만나서 새로운 스승으로서 학문하는 친구로서 긴 기간을 함께 한 인류학자 강신표 선생님께도 감사 말씀을 전합니다. 어제 병든 몸으로 서울에서 일부러 심포지엄에 오셔서 아침 열시부터 밤 아홉시 반까지 함께 자리를 해 주셨습니다. 선생님과의 대화 및 격려는 저의 학문의 일부 이상 이상일 것입니다. 쾌유하셔서 늘 새로운 대화가 이어졌으면 합니다.

돌아가신 에드워드 와그너, 송준호 두 분과의 각별한 만남과 배움도 제게는 큰 자산입니다. 이영훈 선생님께도 감사 말씀 전합니다. 흐트러지지 않을 긴장을, 더불어 학자로서 훌륭한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소중한 연구자와의 만남에서 얼마만큼 많은 것을 터득하였는지 돌아봅니다. 저는 이기백 선생님에게 고문서 등 학문 훈련을 받았습니다. 돌아가신 전 돌아가신 후 어느 때에도 그 엄격한 훈련이 얼마만큼 소중한 자산이 되었는지 이야기 드리지 못했습니다. 수상 소식을 영전에 전하고 싶습니다.

학문의 도정에서 만난 소중한 분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이야기하지 않고 지나쳐 마치 오늘 이 큰 영예가 마치 저의 개인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 같이 보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외롭게 늘 주변에서 생각하고 작업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숱한 분들의 격려와 베풀어줌 때문입니다. 모두 여기에 언급하지는 못하지만 저의 각별한 행운은 모두가 이분들과의 만남 덕분입니다.

저의 수상과 관련하여 연구 주제에 대하여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알다시피 충청도 향리가 중요 주제입니다. 향리는 의외로 모르는 분들이 적지 않은 데 양반사회는 곧 향리 사회라고 할 정도로 儒와 吏, 官과 吏, 양반과 향리의 이원 통치 체제를 갖고 있습니다. 이들 중 1천년 이상 세습하여 왔던 가문이 적지 않습니다. 양반 가문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셈입니다. 이 점에서 언뜻 보아 고도의 안정성을 가진 것 같이 보이는 이 집단에서 근현대 이후 한국의 중요 엘리트들이 다수 배출되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저는 근현대 지역사회의 엘리트들의 출자에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엄격한 의미로 조선왕조의 종언에도 불구하고 그 종언의 역사를 돌아보는 과정을 거치지 못한 한국사회와 한국학계는 어쩌면 조선왕조의 양반들의 시각이나 유산을 그래도 답습하는 것은 아닌지 물을 때가 많습니다. 향리 연구의 어려움은 단순히 자료와 현지 조사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시각과 맞서는 것이 더 큽니다. 여기에 덧붙여 지역사회를 연구할 때 종종 직면하는 문제들, 예를 들면 부산 지역 여성사를 하려면 지역사회와 한국을 동시에 공부하여야 하는 어려움도 언제나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경상도 71개 군현의 향리 가문들과 이들 가문에서 배출한 근현대 엘리트들 나아가 전라도 55개 군현의 그것을 현지 조사와 문서 발굴을 통하여 추진하여 왔는데 어느 날 충청도로 시선을 확장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더불어 경기도와 황해도도 자료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인데 왜냐하면 경상도와 전라도 일원에 대한 조사와 연구 과정에서 한 읍의 향리사회에 대한 조사 연구조차 얼마만큼 힘든지 그 어려움을 충분히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무모한 도전을 또 시작한 셈입니다.

그리하여 더 계속해야 할지 자문하던 차에 충청도 향리 연구와 관련하여 오늘 학술상을 받았습니다. 더 도전하라는 엄명인 셈인데 정말 난감하고 곤경스럽습니다. 그렇지만 또 한편 역사에서 버림받았던 이들이 19세기 후반에 던진 절규를 생각하면 제가 행보를 멈추어서는 안 되겠지요. 주변적이어서 잊힌 이들을, 그 역사를 망각에서 끄집어내는 것은 바로 역사가의 중요 책무의 하나일 것입니다.

현지조사와 고문서 발굴 등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은 굳이 시간을 이야기한다면 35년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새삼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쑥스럽지만 처음 공부에 뜻을 두었을 당시 한국학계를 지배하는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에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미시적으로 검증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를 위하여 직접 문서를 찾아내어 지역사회를 역사적으로 재현하는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이어 내재적 발전론, 달리 말해서 한국사가 근대성에 매몰된 것을 넘어서려 한 것입니다.

당시 한국학계의 지배적인 지적 시선인 내재적 발전론의 도식에 의구심을 가졌고 이것을 지역사회에서 검증하겠다고 한 여정이 어느 덧 여기까지 왔습니다. 중심에 의문을 갖게 된 것은 힘겹지만 돌아보면 제가 오랫동안 천착하여 온 주변, 주변성, 주변인, 주변집단은 바로 새롭게 생각하는 힘을 주었습니다. 계속 이어진 새로운 문서를 찾아 나서고 많은 이들의 이야기와 다채로운 시각, 다시 말해서 다성성을 모색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이 소중한 자리를 만들어준 학회 및 영산 박병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신진 학술상을 수상하는 선생님께도 축하드리며 동시에 수상하는 선생님의 성명이 이상훈인 것도 참으로 각별합니다. 이 자리의 동학 모두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9년 12월 14일

이훈상